학교도 마을도 함께 성장하는 곳···“일 벌이면? 응원합니다”
경남 남해의 ‘끝자락 마을’ 상주면 상주리. 사찰 보리암을 둔 금산과 ‘은모래’라고 불리는 너른 백사장이 있다보니
농업이나 어업보다는 펜션 등 관광업으로 버는 수입이 더 많은 동네다. 금산 자락에는 수백 년 걸쳐 만들어진 다랑논
들이 있는데, 주민들은 다랑논을 일궈 벼농사를 짓고 벼베기가 끝나면 그 자리에 마늘을 키운다.
어른들이 마늘 파종에 바빴던 지난 가을, 상주초등학교에서는 6학년 아이들의 작당이 시작됐다. 망치와 드릴을 쥔 11명이
운동장 벚나무 아래 모였다. 크고 작은 목재들을 이리저리 맞춰 못질하고 나사를 박았다. 담임 교사와 몇몇 주민들이 작업을 도왔다.
저학년 아이들이 ‘뭘 만드나’ 궁금해 서성댔다.
경남 남해 상주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지난해 12월 7일 운동장 벚나무 아래에 만든 비밀 기지에 올라가 손을 흔들고 있다. | 채용민 PD한달 뒤, 벚나무 아래에는 3.5m 높이의 2층 목재 구조물이 만들어졌다. 6학년 아이들은 ‘비밀 기지’라고 부른다. 아이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낮잠 자려고” 1층에 평상을 설치했고, 평상 옆에 “숨어있기 좋은” 공간을 두었다. 2층으로 만든 건
“나무에도 닿고, 뛰어내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였고, 1층과 2층을 연결하려니 “계단은 심심할 것 같아” 사다리를 놓았다.
남해 상주리를 찾은 지난해 12월 7일, 비밀 기지의 2층 상판을 얹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안영학 교장이 전교생을 불러모았다.
아이들이 물었다. “다 완성된 거예요?” “그래, 6학년들이 상량식(上樑式)을 한단다. 집의 가장 윗부분을 얹으면서 안전을 기원하는 일이지.
비밀 기지에서 우리 학생들이 사고 없이 놀 수 있도록 기도하는 거란다.” 안 교장이 2층 상판 아래 ‘자연을 닮아가고 마을과 함께’라고
축언을 남겼다. 6학년 아이들도 각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아래서 드릴 박을 땐 허리가 좀 아프긴 했지만 재밌었어요. 다 만들고
나니 뿌듯하네요.” 2층에 걸터앉아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던 6학년 보람이가 “이 자리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마을과 함께’ 하는 혁신학교
상주초는 2018년 경남형 혁신학교인 ‘행복학교’가 됐다. ‘자연을 닮아가고 마을과 함께’는 행복학교 상주초의 교육 방침이기도 하다.
학교에 ‘나무로 집 짓는 수업을 해보자’고 제안한 6학년 담임 김동욱 교사는 수업을 진행해줄 만한 마을 주민들을 떠올렸다. 그는 “5년
동안 마을에서 살면서 알게 된 주민들을 ‘브로커(중개인)’처럼 끌어모았다”고 했다.
경기 수원시에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을 하다가 남해 상주로 이주해 공방을 차린 정다현씨(35)와 이완술씨(35)에게 수업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두 청년은 미술·실과 시간에 학교로 와서 아이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열었다. 아이들이 그린 비밀 기지 도안을 전문
설계사에게 의뢰해 설계도면으로 제작했다. ‘기지에 와이파이 공유기를 설치하고, 1층에서 2층으로 오를 땐 트램펄린으로 점프해서 이동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은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우리가 진짜 재밌게 놀려고 만든 거 거든요.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걸
강조해주셔야 해요.” 6학년 승훈이의 말이다.
2년 전 상주로 이주한 목수 정윤재씨(48)도 김 교사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6학년 재현이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이의 전입학 절차를
위해 학교를 방문했을 때 당시 교무부장인 김 교사를 만났다.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 목공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에 ‘그렇게 하겠다’고 수락한
적이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 그때는 몰랐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장비와 목재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설계도대로 목재를 절단해 아이들이
작업하기 좋도록 준비했다. “저희 아이 다니는 학교에 뭐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 시작했어요. 이렇게 좋은 비밀 기지가 나올 줄은 몰랐죠.
청년 선생님(정다현·이완술) 두 분이 함께해주시면서 아이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놨고 제대로 된 설계도면까지 나왔어요. 교장 선생님이 투자까지
해주시면서 규모가 이렇게 커졌네요.” 정다현, 이완술, 정윤재씨 등 주민들이 교사가 된 이 수업에서 김 교사는 이들을 돕는 보조교사가 됐다.
김 교사는 “상주초는 아이들도 성장하지만, 교사도 성장할 수 있는 학교”라고 말했다. “다른 학교에서는 교사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려고 하면
교장이 제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괜히 일 벌려 문제 만들지 말자, 위험하다’는 거죠. 그러면 교사들은 꿈을 접게 돼요. 하지만 상주초에서는 다들
지지하고 응원해주시니까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어요.”
상주초 수업들은 이런 식이다. 아이들은 육지와 연결된 남해도 북쪽의 남해대교부터 남쪽 끝 은모래해변까지 다니며 남해 지도를 완성하고, 다랑논에서
손 모내기를 하거나 벼베기를 하기도 한다. 안영학 교장은 “교육은 학교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미래 교육은 학교 밖으로 장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
상주초는 경남도청과 경남도교육청의 ‘작은학교살리기’ 대상 학교로 선정되면서 지난해부터 교육과정 운영비도 지원받는다. 한때 20명대까지 줄었던
전교생은 51명(2021년 12월 기준)으로 늘었다.
■ ‘더불어 사는’ 대안교육 중학교
상주중학교는 교실에서 보이는 ‘해변뷰’ 때문에 ‘그 자리에 호텔이나 리조트를 짓자’는 민원에 시달렸던 학교다. 학생 수 급감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학교가 2016년 ‘대안교육 특성화중학교’로 전환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많은 사람이 특성화중학교라고 하면 엘리트 교육을 하는 ‘국제중학교’를
떠올리지만, 상주중은 인성교육·체험교육 등 대안교육에 특화된 중학교이다. 학비는 일반 중학교와 별 차이가 없다.
학생들은 정규 수업시간인 수요일 6~7교시가 되면 학교 안팎으로 흩어진다.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것들을 정해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는
‘LTI(Learning Through Interest·흥미를 통한 배움)’ 시간이다. 중3 휘수는 해변 옆 커피전문점 사장 이점숙씨(50)에게 바리스타 교육을 받았다.
휘수는 “커피의 다양한 맛과 향에 끌려 배우고자 했다. 1년간 배워보니 바리스타라는 일이 직업으로도 좋고, 취미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커피전문점 사장은 어떻게 학생을 가르칠 생각을 했을까. “어휴, 우리 마을에선 학생 가르치는 게 특별한 일이 전혀 아니에요.” 이씨가 손사래를 쳤다.
“교과목은 학교에서도 충분히 충족이 가능하지만, 그 외의 배움은 학교에서 하기 어려운 점이 있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LTI 시간에 마을 빵집 ‘동동’에도 가고, 주민들이 방과 후 초등생들을 돌보는 ‘상상놀이터’에도 간다.
학교 매점을 운영하는 이들도 학생이다. 학생들이 마을에 있는 협동조합에서 강의를 듣고 운영방식에 대해 배우더니 2019년 1만원씩 출자해
‘무지개협동조합’을 만들고 교내 빈 공간을 빌려 과자와 음료를 팔았다. 조합원 27명이 요일별로 당번을 정해 평일 점심 30분 동안 매점을 운영한다.
어떤 상품을 새로 들일지, 수익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등은 조합원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저녁 시간에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매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여주겠다”며 조합원인 2학년 인교와 승주가 특별히 매점 문을 열었다. 기말고사를 준비 중이던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섰다. 이날 매점 운영으로 번 돈은
모두 6만5000원. 매점 수익금은 교내에서 작은 사업을 해보려는 학생들의 창업지원금으로 쓰인다.
상주중은 면접을 거쳐 학생들을 뽑는다. 공부 잘하고 교사 말 잘 듣는 학생만 골라 뽑으려는 여타 특성화학교와 달리 상주중은 다양한 아이들을
선발해 한 반에 고루 섞이도록 한다. 사회의 축소판을 학교 교실에 그대로 옮겨온다. 여태전 상주중 교장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잘난 놈’ ‘못난
놈’으로 분류하고 우정을 나누는 걸 방해하는 일이야말로, 비인권적이고 그 자체가 폭력”이라면서 “서로 손잡고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본래 모습”이라고 말했다.
■ ‘마을의 감초’ 협동조합
상주초와 상주중의 대안교육은 학부모와 주민들이 만든 ‘남해상주동고동락협동조합’(이하 동고동락)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상주중 ‘무지개협동조합’
학생들에게 협동조합 강의를 한 곳도 동고동락이고, 학생들이 LTI 시간에 가는 빵집 ‘동동’과 마을의 돌봄공간인 ‘상상놀이터’도 동고동락이 운영한다.
중3 휘수에게 커피 내리는 법을 가르쳐준 이점숙씨도 이곳의 조합원이다. 마을 아이들의 다랑논 수업도 동고동락이 맡고 있다.
동고동락은 상주로 귀촌한 상주중 학부모들의 모임으로 시작돼 2017년 4월 협동조합으로 만들어졌다. 초창기 40여명이었던 조합원이 현재 2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조합원들은 상주초·상주중 교사들과 함께 ‘마을교육공동체연구회’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었다. 이종수 동고동락 이사장은 “마을을
살리는 일이 곧 학교를 살리는 일이라는 데 뜻이 모였다. 마을과 학교가 같이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그 과정들을 조금씩 만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남해 상주에서 열린 ‘행복교육지구 청소년 여름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이 직접 만든 뗏목을 바다에 띄우고 있다. 남해상주동고동락협동조합이 남해군과 남해교육지원청의 위탁을 받아 운영한 행사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상주중학교. | 남해상주동고동락협동조합 제공
원주민과 함께하고 비조합원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마을공동체가 형성됐다. 다랑논 수업을 전담하는 마을 교사 신혜란씨(43)는 “온 마을
주민들이 아이들 교육에 나선다”고 했다. “다랑논의 주인은 여든이 넘은 어르신이에요. 매일같이 다랑논을 살피면서 ‘이제 물을 빼야 한다’ ‘논에
우렁이를 더 집어넣어야 한다’ 이런 조언을 해주세요. 아이들 데리고 다랑논 수업하는 게 힘들 때도 많거든요. 학부모들에게 ‘도와주세요’ 부탁을
하기도 해요. 그럴 때마다 나와서 함께해주시죠.”
지난해 3월에는 남해 창선면 율도리에 공립 대안학교인 남해보물섬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초·중·고 대안교육이 모두 남해에서 가능해지자 아이